2022. 3. 11. 23:43ㆍ본 영화
희한하게도, 나는 이 영화의 예고편이나 사전 정보를 거의 접하지 않고 보러 갔다.
알고 있었던 건 영화가 3시간짜리라는 것, 악당은 리들러라는 수수께끼 광인이라는 것, 캣우먼이 나온다는 것, 배트맨 담당 배우가 로버트 패틴슨이라는 것 정도?
그러고 보니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벌써 10년 전이다. 나도 늙었구만....
아무튼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 영화를 본 감상평은,
끝내줬다.
이만하면 [다크 나이트]에 비벼볼 만한 엄청난 DC 명작이라고 생각한다(내가 [조커]를 안 봐서 그쪽으로는 뭐 말을 못하겠다....). 다만 그렇게 말하기 좀 뭐한 게, 이 영화는 [다크 나이트]랑 정말 많이 다른 영화이기 때문에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비슷한 점을 찾자면, 빌런들이 둘 다 또라이라는 것 정도? 근데 그것도 종류가 다른 또라이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일단 스토리와 연출.
이 영화는 기존의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 영화랑 많이 다르다. 화려함과 스피디함을 거의 절제하고, 묵직하고 진중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활동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참 배트맨이, 복수에 불타오르며 악당들을 후드려패는 모습은, 그야말로 무자비하다. 그리고 리들러의 수수께끼를 척척 풀어나가는 모습에서 '명탐정'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주는, 아주 색다른 배트맨이다.
다만 본인의 힘이나 감정을 제대로 주체하지 못하거나, 리들러의 수수께끼 추리를 헛다리 짚는 등, 아직은 미숙한 모습도 보인다. 이런 점들은 '초보 자경단'의 요소를 잘 보여주는 모습들이라고 하겠다.
이 초보 배트맨의 성장 서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또한 이 영화의 연출이다.
본작의 배트맨은 말 그대로 딥다크 배트맨이다. '나는 복수다'라는 키워드에 걸맞게, 범죄자들을 사정없이 후드려팬다. 어느 정도냐면 밤하늘에 떠오른 배트 시그널을 보자마자 잡졸들이 벌벌 떨면서 도망갈 정도로, 이 영화의 배트맨은 '복수'이자 '공포'이다. 본인이 말했듯이 공포란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고.
이러한 스타일은 경찰들과도 반목을 빚는다. 고든 경위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경찰들은 이 별종 자경단을 고깝게 본다. 그리고 본인 역시 소통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시종일관 냉랭 그 자체의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고담의 어둠과 깊은 비밀들을 마주하고, 고든과 캣우먼 등의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나가고, 결정적으로 마지막 전투에서 잡졸이 내뱉은 대사에 한 방 먹으면서, 단순한 복수와 공포가 아닌,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홍수 속 사람들을 구출하는 장면, 피해자를 헬기에 실어보내는 장면이다. 또한 처음에는 까칠하기 그지 없었던 경찰들과의 관계도, 사건 수사를 함께 해가며 차차 나아지는 것도 포인트.
분노로 만들어진 복수 덩어리가, 고담의 수호자 어둠의 기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낸 것이 [더 배트맨]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 배트맨이 활동하는 이곳 고담 시는 정말 지독하게 어둡다. 누가 보면 예산 모자라가지고 밤에만 촬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낮에 찍은 장면'이 기억 나는 게 거의 없을 정도다. 도시의 어둠과 배트맨의 어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배트맨이 피해자를 구출하는 장면은, 그 밝은 낮이 똑똑히 기억 난다. 그 직전이 끔찍한 테러 현장이었기에 더욱 대비되어 뇌리에 각인된다. 배트맨과 고담 모두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 멋졌다.
로버트 패틴슨이 배트맨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좀 반신반의했다. 요즘은 예술영화 위주로 찍으면서 연기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지만, 나는 이 양반을 마지막으로 본 게 [뉴 문]이었기 때문에....(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책은 다 읽었는데 영화는 [뉴 문]까지만 봤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우려를 완벽하게 불식시키는 멋진 연기를 선보였다. 본작의 배트맨은 여러 번 말했지만 어두컴컴하다. 변장을 위해서 눈가에 시커먼 칠을 하고 다녀서 더욱. 그게 배우 특유의 퇴폐미와 좋은 시너지를 일으킨다. 특히 이 영화는 배트맨의 눈에 자주 시선을 고정시키는데, 인물들을 가만히 지켜보며, 여러 감정을 품는 그 눈빛 연기가 아주 멋있었다.
캣우먼 셀리나 카일. 배우는 조이 크래비츠. 내가 이 사람을 어디서 봤나 싶었는데, [신기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 나왔던 사람이었다. 제법 중요한 캐릭터로 나왔었는데 바로 떠오르지 않다니 역시 [신동범]은 문제작이구나....
아무튼 이 분도 연기력이 아주 좋았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영화에 있어서 필수적인 역할은 아니다.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몇 번 맡긴 하지만 꼭 이 캐릭터여야만 하는 느낌도 없고. 다만, 어둠에 찌든 배트맨을 빛으로 이끌고, 본인 또한 배트맨에게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무척 중요한 포지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행동 동기가 '자신의 애인이 아버지에게 살해당함'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오늘도 사랑의 위대함과 위험함을 깨닫게 됩니다....
엑스트라 여캐를 메인 캐릭터의 각성제 용도로 사용하는 건 이제는 다소 지겨운(그리고 제발 자제했으면 하는) 냉장고 클리셰이지만, 그게 남캐가 아닌 여캐를 각성시키는 건 뭐, 나름 신선했다. 그치만 한 번 더 그러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리들러. 이 작품의 메인 빌런이자 슈퍼 사이코 중2병 또라이.
공권력을 우롱하고, 배트맨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퀴즈를 내는 등의 지능 플레이를 하고, 본인의 무력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점에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생각나는 녀석이다. 담당 배우인 폴 다노가 신들린 또라이 연기를 선보여서 더더욱.
그런데 메인 빌런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일으키게 된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
대충 짐작은 간다. 고아 출신이고, 재개발 관련 진실들을 알게 되면서 고담의 썩은 상류층에게 엿을 날리고 싶었다는 정도. 실제로 이 녀석의 타겟은 마피아 등과 결탁한 부패한 권력 집단들이었다. 심지어 본인은 자신 또한 배트맨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수호하는 자경단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녀석 의도는 나름 좋았네' 같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배트맨이 직접 말했듯이 리들러는 그냥 미친 사이코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게 리들러 계획의 최종장인 마지막 테러 장면이다. 추종자들은 '나는 복수다'를 외치며, 그들의 행동 키워드도 배트맨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어필한다. 실제로 그들의 출신성분과 제거 타깃을 생각하면 일견 맞는 말이고, 이 때문에 배트맨도 한 방 맞아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이 최후의 테러에서 쏴재낀 총구가 향한 건, 새로운 시장도 시장이지만 결국 거기에 있던 불특정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이다. 자기들 딴에는 무슨 정의를 행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그냥 찌질이 살인자들에 불과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리들러의 뿌리와 동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건, 관객의 과도한 이입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조커]가 논란이 되었던 걸 생각하면 그와 같은 조치는 나름 영리했다 하겠다.
[데드풀 2]에서 웨이드 윌슨 놈이 케이블을 보면서 "넌 너무 어두워! 무슨 DC 유니버스에서 왔냐?"라는 개드립을 치는데, 솔직히 [원더우먼, [수어사이드 스쿼드], [아쿠아맨]밖에 안 본 내 입장에선 기존 DCEU가 그렇게 어두웠는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이 영화야말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분명한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DC식 어두움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정말 만족스럽게 봤고, 흠 잡을 데가 없으며 굳이 흠을 잡고 싶지도 않다. 앞으로도 DC가 이런 식으로 스타일을 밀고 나간다면 MCU와 결을 달리하면서 좋은 소리도 많이 들을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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