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 15:59ㆍ읽은 책
생각해보니, 사람이 죽지 않는 일본 소설을 읽은 게 참 오랜만이다. 추리소설만 파면 이게 안 좋다니까.
대신 이 소설은, 누가 죽지는 않았지만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책이다.
일단 제목이 파격적이라 손이 갔다. '최애'라는 신조어가 제목으로 쓰인 책이 다른 것도 아니고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다니, 어그로도 이만한 어그로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뒤에 따라붙는 단어는 '타오르다'. 처음 봤을 때는 무슨 뜻인가 했는데, 나쁜 일로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는 것을 炎上라고 하니 적절한 표현이다 싶었다. 그러고 보면 제목에서 내용이 직관적으로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돌은 아니지만, 덕질하는 가수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아카리처럼 최애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는 그런 명석한 타입은 못 된다. 노래 위주로 좋아하고, 최애가 어떤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쌓는지, SNS를 통해 최근에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파악하는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내 경우에는 아카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스스로의 일상 생활을 포기할 정도로(물론 그 포기의 원인이 오롯이 최애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열과 성을 다해서 덕질하는 모습에는 광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그 끝이 전혀 해피엔딩이 아니어서 더욱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하지만 이런 전개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더욱 어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마지막 콘서트가 끝난 후의 그 절망은.... 어쨌든 덕질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코 아름답지 못한 논란의 과정과, 최애의 연애 활동의 마지막을 오롯이 지켜본 아카리의 모습을 종이 너머로 지켜보았기 때문에, 더욱 슬프고 처절한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덕질'하는 것이 다양한 분야에 퍼져서 제법 자연스럽게 되었고, '덕질'이라는 분야에서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아이돌 혹은 가수 덕질이겠다. 이 소설은 지금의 시대가 이렇게 활발한 '덕질'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이기에 나올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뭐 50년 전이라고 해서 이런 덕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비틀즈가 설리번 쇼에 출연했을 때의 그 광기란), 그건 좀 특수 케이스들이고, 현재는 아카리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스타일이든, 가볍게 그 사람의 작품이나 그 사람 자체를 가볍게 즐기는 스타일이든, 덕질이 대중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깊게든 얕게든 아카리라는 캐릭터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본 소설을 쓴 우사미 린은 99년생의 신인 작가로, 두 번째 작품인 이 책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떠오르는 신인이다. 작가 소개를 간단히 읽었을 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지만, 후반부부터 몰아치는 아카리의 심리 표현은 확실히 무척 비범하다고 느꼈다. 가벼운 덕질을 지향하는 나조차도, 그 집착적인 열망과 광기, 절망에 마음이 저절로 조여올 정도였다. 데뷔작인 <엄마>도 조만간 정발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를 갖고 기다려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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