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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화

[모노노케 히메]를 봤습니다.

by 표류선 2020.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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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산의 성우인 이시다 유리코 상은 유명 일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니게하지)]의 유리 이모를 연기한 배우이시다.

 

 

 

 

 

한국판 포스터에는 "대자연의 수호신 원령공주가 온다"라고 적혀있는데, 모르긴 몰라도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적은 것이거나, 그럴듯해 보이기 위한 낚시용 문구임이 틀림없다.

 

영화의 첫인상은 잔인하다 였다. 아시타카가 활을 쏘아서 적을 맞추면 팔다리나 모가지가 숭텅숭텅 잘려나가는데, 굉장히 충격적이다... 심지어 은근히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청불을 먹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수위를 자랑하기 때문에 아무 정보 없이 영화를 봤다간 십중팔구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초장부터 후반부까지 그런 커팅 장면이 등장하니 여러 의미로 인상이 남을 수밖에 없는... 내용도 그렇고 아마 애들이 이 영화를 볼 가능성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은 거 같기도 하다.

 

포스터에는 산만 나와있는데, 다들 알다시피 주인공은 아시타카이다. 원래 제목도 [아시타카 전기]였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또다른 인물로 에보시가 있는데, 셋의 이야기가 톱니바퀴마냥 맞물리면서 이야기가 흘러가고, 영화의 주제를 완성시켜간다.

 

영화의 주제는 [나우시카] 때랑 비슷하다. 다만 비슷할 뿐이지 같지는 않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점에서 뼈대는 닮아있지만, [나우시카]의 인간과 [모노노케 히메]의 인간은 몹시도 다르다.

 

일단 [모노노케 히메]가 [나우시카]랑 가장 다른 점은, 여기선 완전히 착한 진영도, 완전히 나쁜 진영도 없다는 점이다. 인간 측과 자연 측 모두 저마다의 사정을 품고 있다.

인간들은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자연을 공격하지만, 인간들을 대표하는 타타라 마을의 생활 풍경은 한없이 활기차고 밝게 그려진다. 특히나 제철소에서 여자들이 일하고, 마을의 모두를 통솔하는 자가 에보시라는 점은 페미니즘과도 연결을 지을 수 있다. 다만 어쨌든 이들의 생활상은 결국 자연을 짓밟아 이루어진 것이다. 긍정적으로 묘사는 되나, 이상적이지는 못하다.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겠고...

인간들에게 자연은 수도 없이 짓밟혔다. 그리고 자연(짐승) 측, 주로 멧돼지들은 그 복수로 인간들의 마을을 수도 없이 파괴했다. 모로의 대사에서 나오듯, 산 역시 짐승들의 공격에 인간들이 도망치다가 버려진 존재이다. 에보시도 짐승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일갈하고. 원인 제공을 따지자면 무게가 달리 실리겠지만, 어쨌든 짐승들이 인간들을 죽인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결국 모두가 서로의 삶과 터전을 위해 대립한 것이다. [나우시카]는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연을 예찬하는 쪽이지만, [모노노케 히메]는 서로가 각자의 정의대로 움직인다. 그러니까 어느 한 편을 섣불리 악당으로 단정지을 수가 없다. 뜯어보면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슴신(시시가미)이 눈에 띈다. 사슴신은 인간과 짐승신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중립을 지킨다. 생명을 탄생시키지만 동시에 생명을 거두어간다. 목이 잘려 폭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들을 그대로 앗아갔지만, 최후의 최후에는 결국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되살렸고, 아시타카와 산의 저주도 해소해주었다. 이로 보면 사슴신은 자연 그 자체이다. 짐승들도 인간들도 결국에는 자연의 산물이기에 그는 그저 관망할 뿐이다. 어느 쪽도 대변하지 않는다. 사슴신은 자연이기에 파괴하고, 회복하고, 관망한다.

 

아시타카와 산은 회색분자다. 아시타카는 짐승과 인간에 의해 저주를 받았다.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타타라 마을까지 가고, 활기찬 마을의 생활상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그들을 돕게 된다. 하지만, 아시타카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은 에보시를 비롯한 인간들에게 끝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산은 모로 일족의 습격에 의해 인간들에게 버려졌다. 그리고 모로의 딸로 자라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모로 일족뿐, 옷코토누시 정도를 제외하면 짐승들에게 계속 배척당한다. 모로 역시 '추하고도(인간) 아름다운(짐승의 삶) 내 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그래서 산은 명백하게 숲의 편이지만 숲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아시타카와 산에게는 차이점이 있다. 산은 마지막까지 숲의 아이로써 인간을 싫어하지만, 아시타카는 어떻게든 숲과 인간이 화합할 수 있도록 뛰어다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이 아시타카라는 인간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에보시가 자신과 관점이 충돌했던 아시타카를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2시간 정도 되는 러닝타임에서 아시타카가 해온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결론을 내보자면 [모노노케 히메]가 하고 싶은 말은 "서로 화합하며 나아가자"가 되겠다. 좀 많이 줄이긴 했는데 어쨌든 이 말이 하고 싶은 거다. 마지막까지 딱 부러지게 해결된 것은 없다. 산은 "아시타카는 좋아해. 하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고, 에보시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타타라의 주민들에게 "들개들에게 목숨을 구원받았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아시타카를 불러들여라"라고 말한다. 아시타카라는 인물을 통해서 반대측의 입장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마지막까지 서로 화해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 가운데에서 아시타카가 산에게 "그래도 좋아. 나와 함께 살아가자"라고 말한다.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다.

 

여러모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에 대한 사상(?)이 집대성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시에 완결작이라고도 하겠고. 특히나 인간과 자연에 대해 이 정도로 심오한 고찰을 보인 작품은 앞으로도 나오기 쉽지 않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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