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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화

[붉은 돼지]를 봤습니다.

by 표류선 2020.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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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를 탈퇴하자마자, 지브리 작품들이 넷플릭스에 들어왔다는 게 떠올랐고, 아직 완전히 계정이 해지될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 얼른 지브리를 정주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손 댄 적이 없는 이 영화를 선택.

 

일반적인 지브리 영화는 아동용이다. 정확히는 어린 시절에 보면 되게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실상은 대단히 다양한 설정이나 은유들로 가득 들어차 있지만.

근데 이 영화는 그런 지브리 영화들에 비하면 좀 매니악하다. 딱 봐도 어떤 연령대의 어떤 사람들을 노리고 만들었는지 굉장히 티가 난다. 포스터에 적혀 있듯이 로망이 있고, 그 로망을 멋있게 그려내고 멋있게 말한다. 돼지 주제에 인간보다 멋있는 건 반칙이잖아...

 

근데 돼지라고 차별받는 것도 없고, 작중에서 왜 돼지가 되었는지 명확하게 이유를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물론 포르코는 스스로를 돼지라고 여기면서 인간들과 다르다고 선을 계속 그으니 아주 필요없는 설정도 아니다. 그냥 연극적 장치라고 받아들이는 게 편할 거 같다.

 

"애국은 인간들끼리나 하쇼"라던지, "파시스트로 사느니 돼지로 사는 게 나아"라던지, 은근히 메시지를 던지는 대사들이 있으나,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같은 작품들에 비해선 메시지의 심각성은 덜한 편이다. 사실 저런 대사들을 빼고 보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대신 매니악한 취향을 노린 영화이면서 유머러스함으로 가득 차 있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멋지고, 악역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별로 악당같지 않다. 맘마유토단은 비행기를 타고 노략질을 하는 공중해적 a.k.a. 공적이지만, 애들한테 상냥하고 피오를 존중하며, 은근히 어리숙한 면도 보이는, 그냥 돈 욕심만 많은 바보들 느낌이다. 커티스 역시 무슨 나쁜 마음을 품고 포르코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덤빌 뿐이다.

분명 시대적 배경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이다. 게다가 작중 언급을 보면 무솔리니 정권이 들어서는 타이밍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시종일관 평화롭다. 공군이 여러 번 포르코를 추격하지만 그다지 위협이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낭만을 그리는 영화고, 그런 현실적인 요소들이 끼어들어버리면 낭만을 해치게 되니까. 공적이고 현상금 사냥꾼이고 커티스고 간에 결국 다 같은 파일럿이다. 피오가 일갈했듯이 이 영화 속 파일럿들은 돈도 여자도 아닌 명예를 위해서 움직인다.

...돈키호테 집단인가? 단어를 뱉고 보니 어째 상종하고 싶지 않은 종족들인데. 난 <돈키호테>를 읽는 동안 산초에게 이입을 했단 말이다. 아이고 영감님 그건 거인이 아니고 풍차입니다 제기랄...

 

근데 이해도 된다. 어쨌든 이 세계관에서도 1차 대전이 치러졌고, 따라서 세상의 쓴맛과 잔인함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차고 넘칠 것이다. 전후 10년이면 충분히 현타들이 올 타이밍일 것이고. 그럴수록 낭만이란 가치를 붙들고 싶겠지. 원래 쓴맛을 알고 나면 단맛이 더 땡기는 법이여.

 

명예에 관심이 없는 파일럿이 있긴 하다. 마르코(포르코). 전쟁에서 직접 개고생을 한 탓에 낭만을 잃어버린 우리 돼지 아저씨만 그런 거에 관심이 없지(추측인데, 커티스는 몰라도 공적들은 군인 경험이 없는 파일럿들이라고 생각된다). 아, 그래서 돼지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낭만이고 자시고 나는 모르겠다 이런 느낌으로... 돼지가 된 방법은 안 나왔지만, 최소한 돼지가 되어버린 건 자의인 모양이다. 그리고 본인은 그거에 만족하고. 그럼 된 겨. 메데타시 메데타시...

 

간략하게 줄이자면, 진정한 악당도 없고, 복잡다단한 갈등구조도 없으며, 중간중간 들어있는 92년도 유머에 피식거리면 되는, 머리를 비우고도 충분히 관람이 가능한 영화라고 하겠다. 비행기를 좋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본인 취향을 듬뿍 담아낸 낭만덩어리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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