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4. 14:56ㆍ본 영화
이 영화의 진정한 제목은 [웬우와 텐 링즈의 전설]이다.
권력을 탐하는 폭력적인 지배자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순정남
복수에 불타는 살인귀
자식들에게 냉철하지만 동시에 따스한 아버지
사랑을 위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불도저
아내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가슴에 새기는 처연함
마지막까지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
따거
오야지
대디
파더
그 이름은 쑤 웬우.
그는,
신이다.
샹치와 시무 리우에게는 미안하지만,
머릿속에 남은 게 양조위밖에 없다.
그냥 미쳤다. 표정과 눈짓, 주름살과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작품이고 화보다. 그는 링의 힘으로 늙지 않았다는 설정에 정말 완벽하게 들어맞는 미친 비주얼의 소유자이면서, 폭력성과 사랑이라는 선과 악을 동시에 품고 표출하는 기가 막힌 연기력의 소유자이다. 소싯적 홍콩 영화에서 하던 그 달콤하고 처연한 눈빛을 여기서 똑같이 보여주지만 설득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부기영화 놈들이 한 화를 통째로 양조위 찬양으로 때워도 인정할 정도다. MCU 역사상 한 손에 꼽는 끝내주는 빌런 캐릭터고 끝내주는 배우다.
장점 많다.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많다. 근데 그것보다 양조위 찬양으로 키보드를 때리고 싶을 만큼 미친 듯이 매력적이다. 후반부에 등장한 양자경도 그 카리스마로 분위기를 단숨에 휘어잡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웬우와 양조위의 파괴적인 카리스마가 쫙 깔려 있다. 그것이 이 영화 최고의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다. 그만큼 양조위는 할리우드 데뷔작에서 어마어마한 일을 해냈다.
분명 빌런이고, 세상을 지배할 야욕을 품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 대단한 얼굴로 기가 막힌 눈빛을 지으며 엄청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저런 악당이라면 응원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그의 행적이 아니라 그의 비주얼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결코 폭발하는 일 없는, 나긋나긋하면서도 진중한 허스키 저음 보이스는 금상첨화.
무엇보다 그 눈빛.
아내와의 첫 만남 첫 전투 때, 갓 태어난 샹치를 바라볼 때, 죽은 아내를 목격했을 때, 자식들과 재회했을 때, 적으로 재회한 자식들을 맞닥뜨렸을 때, 자신을 유혹한 목소리의 정체를 보았을 때, 마지막 순간에 역주마등과 함께 아들을 볼 때.
그때 그 눈빛.
주름.
표정.
모든 것.
이거.... 사람 미칩니다.
내가 진짜 이러는 일 없는데, 살다살다 환갑을 앞둔 아저씨 배우에게 폴인러브 할 줄은 몰랐다.
아니 내 잘못이 아니라니까? 저 양반이 잘생긴 탓이고 연기를 잘하는 탓이고, 제작진들까지 양조위에 폴인러브 되어서 무진장 멋지게 뽑아놓은 탓이지.
어디 양조위 뿐인가? 양자경도 양조위 못지 않게 카리스마를 뿜으면서 무협 배우의 위상을 톡톡히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뛰어난 무술을 보여주는 이 영화지만, 양조위와 양자경의 움직임은 그 질 자체가 아예 다르다. "아아 미국인들이여.... 아직 모르겠는가? 이것이 바로 「오리지널 오리엔탈 마샬 아츠」라는 것이다...." 같은 느낌. 내가 보기엔 제작진들도 이 두 배우 덕질에 여념이 없었던 거 같어.
....너무 양조위 얘기만 했네.
뭐 양조위가 이 영화 장점의 9할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 외에도 좋은 점이 많은 영화다.
다른 얘기들도 좀 해 보자면, 일단 액션이 정말 좋았다. 그동안의 홍보 영상에서 입을 모아 이야기한 것이 액션이 좋다는 얘기였는데, 그게 약 판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마블 영화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육탄전을 보여준다. 특히 초반부의 이 버스 전투와 중간의 마카오 빌딩 전투는, 마블 특유의 CG 떡칠 전투가 아닌, 하지만 [윈터 솔져]의 액션신과는 또 결이 다른,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선보였다.
물론 본작이 과거 중국과 홍콩의 무술 영화에서 대단히 많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장면이라고 말하기는 힘드나, 의의는 이걸 할리우드 한복판에서 펼쳤다는 것에 있다고 본다. 옛 무협 영화를 너무 차용했다는 평도 본 적 있지만, 나는 그 쪽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더 좋게 느껴졌다.
양조위가 압도적이어서 그렇지, 다른 캐릭터들도 괜찮았다. 케이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도저 같은 개그 캐릭터인데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활약을 하는 모습이 좋았다. 주인공과의 연애 느낌이 거의 나지 않는 히로인 캐릭터가 오랜만인 것도 포인트. 샤링도 액션이 멋있었고 배우 장멍의 매력도 엄청났다. 특히 중반부에 길다란 코트 입고 휘적휘적 다니는 모습이 엄청 멋있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건 동양인과 동양 문화에 대한 묘사. 그동안 서양 영화에 만연했던 오리엔탈리즘 요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확실히 동양계 제작진들이 각 잡고 만들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막 동양 뽕에 취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적절한 선을 잘 잡았다는 느낌이다. 특히 케이티와 케이티의 가족에 대한 묘사, 그리고 케이티의 애창곡인 호텔 캘리포니아(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노래)에서 더 그런 포인트들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막판에 등장한 위대한 수호자. 서양 영화에서 동양 용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희귀한 체험이야. 외에도 주작, 구미호, 기린 등 동양 설화 속 영물들이 대거 등장해서 무척 반갑고 좋았다. 모리스 커여워요 모리스.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막 영화 몰입을 해칠 정도로 큰 결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보고 나온 후 영화를 곱씹을수록 조금씩 커져간다. 웬우가 너무 매력적인 캐릭터다보니 특히 더 부각되는 단점이다.
일단 "샹치가 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그에게서 도망쳤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영화 속 묘사를 보면, 샹치 역시 어머니를 죽인 이들에 대한 복수심이 강했고, 실제로 복수를 해낸다. 그리고 복수한 직후 도망쳤다고 나오는데, 이는 살인이라는 아버지의 방식을 부정하는 듯했던 예고편 속 묘사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설령 죽인 직후 죄책감이 들었다고 해도, 어쨌든 자신 또한 아버지의 복수심에 격한 공감을 했지 않은가. "허억 마맙소사 내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말도 안돼 덜덜덜" 같은 건 솔직히 좀 진부하지 않아? 물론 진부하다고는 해도 가장 타당한 원인이긴 하다. 죽일 마음을 먹는 것과 실제로 죽이는 것은 몇 억 광년의 차이가 존재하니까. 하지만 그걸 관객의 상상에만 맡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보여줘서 타당성을 확립하는 것이 영화의 역할이다. 복수하러 떠난 직후에서 바로 미국의 일상으로 이어지니 너무 불친절하다. 더군다나 중반부 데스 딜러와의 전투를 보면 샹치는 결코 불살주의자는 아니다. 다소 망설인 탓에 웬우한테 저지당했지만, 그거 아니었으면 데스 딜러는 샹치한테 칼 맞고 바로 요단강 건넜다.
또한 전개에 좀 더 설득력을 부여하려면 그 전의 과정에서 아버지의 방식에 대한 반감 같은 걸 더 깊이 있게 묘사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러지도 않았고 엄마를 찾는 샤링에 말에 "엄만 이미 죽었다"는 말까지 했으니. 뭣 땜에 기분이 상했는지 애매하다. 14살에 탈주했다고 했으니 단순 사춘기인가?
샤링은 좀 낫다. 케이티에게 라떼 토크를 시전하는 장면이나, 탈로 마을의 장로에게 "어린 놈의 자식이"를 시전하는 것을 보면, 웬우의 마인드는 흔한 아시안 가부장 꼰대 아버지로 보이는데(천 년 넘게 살았다고 하니 무진장 진한 슈퍼블랙라떼겠지), 아마 그렇기 때문에 샤링에게 무술도 안 가르쳐주고 차갑게 대한 것으로 보인다. 나름 의지할 구석이었던 오빠가 탈주한 이후의 상황은 더 쌀쌀맞았을 것으로 추측되고(혼자서 무술을 연마하는 걸 냅둔 걸로 봐서는 샤링에 대해서는 아예 방임 수준으로 신경을 끄고 살았던 걸 수도), 그것을 못 견뎌 탈주했다고 한다면 샤링의 도주는 좀 설득력이 있는 편이다. 다만 탈주한 후 마카오에 '자신의 제국'을 설립한 것을 보면, 이 친구도 아버지의 잔인한 방식에 반감을 가지고 나간 거 같지 않다. "아버지의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라는 말도 했었고, 태도나 행동을 보면 웬우 못지 않은 야망을 가진 캐릭터다. 아마 웬우가 개꼰대가 아니었다면 텐 링즈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렇다면 잔혹함이 아닌 다른 반발의 원인을 찾아야 할텐데, 주요 후보는 '복수를 우선시해 학대에 가까운 훈련만을 지속했고, 그 과정에서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소홀히 했으며, 특히 샤링에겐 방임에 가까운 무관심으로 일관해 반발이 일어났다'같은 이유가 있겠다. 다만 이 경우에도 문제가 있는 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샤링은 그렇다 쳐도, 자기 입으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 샹치는 뭐가 되나. 게다가 그는 앞서 말했듯 아버지의 잔혹함에 대한 불만도, 애정 없이 훈련만 시키는 방식에 대한 불평도 보이지 않았다. 웬우의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샤링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설명이 부족하다고 설명이. 물론 말로 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런 따스한 사랑을 바라는 것이 아이들이지만, 말로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는 또 설득력의 힘이 다르잖아. 말을 해 얘들아.... "아빠가 좀 더 우리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같은 대사 살짝씩 끼워넣어보라고....
후반부 전투에서 샹치는 "우리는 어머니가 떠난 후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했지만 당신은 링과 힘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자식들을 살인병기 킬러로 길렀다"라고 자신의 반감을 설명하지만, 두 주장 모두 영화 장면만 읽어선 뒷받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게 문제다. 남편-아내 관계의 서사는 탄탄한데, 아버지-자식 관계의 서사가 부실하다. 전자는 빌런의 행동동기가 되고, 후자는 히어로의 행동동기가 되는데, 후자가 약함으로서 자연히 빌런의 행동에 좀 더 설득력과 당위성이 부여되어버린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메인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납득이 잘 가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웬우가 되어버렸다. 이러니까 주객전도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물론 양조위가 그 연기력으로 캐릭터 자체의 흠결을 많이 메꿔준 탓도 있다만.
뭐 그렇다고 웬우가 다 옳단 건 아니다. 어쨌든 못난 애비인 건 팩트잖아? 자기 방식의 사랑이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아빠 노릇 정말 못 한 거 맞다. 애들한테 사랑을 보여주지 않고 물리적으로 갈구고 방임하고 막판에는 가스라이팅 한 숟갈까지. 양조위 아닌 다른 배우가 했더라면 캐릭터성 오락가락하는 쓰레기 아버지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치만, 양조위가 그 얼굴로 대충 처연한 표정 지어주면 "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혹하게 되는 게다. 치트키도 이런 치트키가 없다. 그리고 그 치트키에 의존하는 바람에 여러 부분에서 개연성을 손해 본 게 많이 아쉽다. 하지만 양조위가 잘생겼으니 괜찮지 않을까....? 아닌가....
어차피 그 뒤에 나온 진 최종보스인 어둠의 트웰러가 대단히 시원찮은 녀석인데, 괜히 떡밥 쌓는다고 애꿎은 웬우를 페이크 최종보스로 전락시킬 게 아니라, 좀 더 가족의 스토리에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 길게 쓰긴 했는데, 말했다시피 영화 감상을 크게 해치지는 못한다.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될 만큼 양조위가 멋지니까 괜찮다. 웬우 사후의 다소 구린 드래곤 전투나 최종 전개의 빈약함이 신경 쓰이지만, 잠깐이니 참자. 그러면 마블 팬들의 탄성을 부르는 쿠키 영상이 기다리고 있다.
OST의 경우 리치 브라이언, 앤더슨 팩 등의 동양계 가수들과 더불어, DPR LIVE, DPR IAN, 비비, 서리, 자이언티, 호시노 겐 등 한국과 일본의 유명 가수들도 대거 참전했다. 갠적으로는 버스 전투의 브금이었던 'Run it'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서양 영화에서 보였던 어설프고 애매한 동양 묘사가 싫었던 사람이라면 더욱 좋아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개봉 전까지 중국코인 어쩌구 하는 소리들이 많았고, 지금도 네이버 평점에는 그거 관련 악평으로 수를 놓고 있지만, 솔직히 억까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이전까지랑은 색다른 마블 영화로, 아시안 아메리칸들을 위한 [블랙 팬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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